술을 잘 먹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건 어렸을 때 부터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술을 진탕 먹고와서도 투게더나 붕어싸만코를 사오곤 했고, 가끔은 자는 척 하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가곤 했다. 그냥 아빠를 보면서 왜인지 나는 술을 잘 먹겠거니 생각해왔었다. 그렇다. 나는 내 떡잎 속의 술냄새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다지 술을 먹을 기회는 없었다.
나는 여초과를 나왔고 여초직장에서 근무했기에... 그리고 대외적으로 지금까지도 모범생 일변도를 쭉 달려왔기 때문에 술을 진탕 먹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술을 많이 먹은 행사들이 정말 이벤트처럼 기억난다. 모두 그것도 대학시절 얘긴데, 3학년때부터 임용시험 준비한다고 그 기억도 대개 10년 전의 흐리멍텅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첫 발령지에서 수련회에 가서 술을 그냥 죄금(소주 반병도 안되었던 듯ㅋ) 먹었는데 아버지뻘 동료 선생님이 다영샘은 애주가라며 두고두고 놀리시던 기억... 회식으로 진탕 먹어보긴 글렀군 싶었다 ㅋ (일부 아저씨 샘들 이외엔 회식도 잘 안하지만서도. 끼고싶지도 않고) .... 2차 전직을 노려야겠네.
미국에 와서도 그냥 반주정도로 즐기던 술은 꽤 길었던 임신기간, 수유기간동안은 아예 끊을 수 밖에 없었다. 둘째도 다 낳고 돌도 지나고 얼추 갓난이 티를 벗게 해 놨더니 마음의 여유가 생긴건지 (당연 아님) 힘든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뭐 누구나 오는 슬럼프며 과도기며 뭐 바닥을 치고 흔들리는 그런 때. 그때 왜 인지 어디서 본 것 처럼 냉장고 문을 열어 술을 찰찰찰 따라 마셨다. 어 괜찮네. 좀 안 슬프고. 물론 청승맞게 울면서 마셨지만.
아... 술맛이구나. 30인생에 드디어 적성을 제대로 찾은 것인가.
그 뒤로 와인이며 보드카, 진, 럼, 맥주, 소주 등 주종을 가리지 않고 잡스럽게 꾸준히 마셨다. 오빠도 함께하니 엥겔지수에 상당 부분을 주류가 담당하고 있게 되었다. 오빠랑 얘기하다 보니 우리는 애주가 아빠를 가진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아버지처럼 힘든 하루를 술로 달래고 있었다. 우리의 세상은 더 살기 좋아지고 편해졌지만 고민과 피곤은 계속된다. 세상은 바뀌어도 인생은 비슷한 모습으로 되풀이 된다. 누군가를 조언 해 주더라도 '나 때는 말이야', '너 때는 말이야' 같은 개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되겠지.
채우면 비워야 하듯이. Gym에 가서 미친 유산소를 한다. 그 때마다 어제 먹은 알콜을 싹 다 날리게 해주세요 하면서 떠오르는 어떤 신, 아마 술의 신 ... 아니 아름다움의 신에게 한번 빌어본다. 런지 하나마다 맥주 한 모금과 초콜렛 한 조각각을 가져가 주세요. 제발요. 그래야 또 마시니까... '런지 하나에 맥주 한 모금, 초콜렛 한 조각을 떠올려 봅니다.' 윤동주 선생님 죄송합ㄴ....
새로운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끊어야 할 때 절주도 잘 하고 있고. 낮에 먹거나 운전을 앞두고 먹는 일은 없고. 집에서만 먹으니 나름 안전하게 잘 먹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위에 장황하게 써 놓은 만큼 아직 잘 못 먹어서 누가 나랑 술 먹으면 고거 먹으면서 나댄거야 하겠지만.
오빠가 새로운 드라마를 보면서 드라마 주인공들이 자꾸 위스키를 마신다며 얘기하길래 이번 기념일엔 위스키를 사줄까 하고 있다. 아내가 남편한테 술 선물 줘도 되나 싶긴한데.
그냥 마시게 되었다는 이야기. 목요일도 금요일도 아닌 화요일 저녁에 남편이랑 일찍 와인 마시고 잠들 수 있어서 누가 이거만 보면 참 팔자 좋다고 생각할 것 같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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